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드라마', 최동원의 프로야구 8년

---KBO Legends

by econo0706 2022. 9. 23. 15:25

본문

▲ KBO 40주년 특집 최동원 일러스트 / 출처=KBO

 

1984년 10월 8일, 비가 오던 그날

 

"운동장 가서 선발이 바뀌었지."


1984년 10월8일. 서울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롯데-삼성의 한국시리즈 7차전이 하루 연기됐다. 프로야구 역사를 바꾼 빗줄기. 삼성 눈물의 전조였다.

 

1984년 10월  9일

 

다음날인 10월9일, 한글날 공휴일이었지만 밤 경기로 열렸다.

 

하지만 롯데 에이스 최동원의 선발 등판은 불가능해 보였다. 1,3차전에 이어 6일 5차전을 완투했던 그는 7일 6차전에서 예정에 없던 구원등판을 했다. 잘 던지다 갑작스레 마운드를 내려간 임호균의 뒤를 이어 5회부터 5이닝을 던지며 시리즈를 원점으로 돌렸다.

 

9일간 세차례의 완투와 한차례의 구원으로 4경기에서 무려 31이닝을 소화한 터. 더는 무리였다. 최동원을 앞세워 롯데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끈 강병철 감독의 회고.

 

"동원이는 던지겠다고 했어… '경기 후반에 기회가 오면 생각해보자'고 하면서 말렸지. 그런데 운동장에 나가더니 다시 찾아와 그러는거야. '감독님,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제가 초반에 나가서 할만큼 하고 들어오겠습니다' 하더라고. 그 친구 아니면 할 수가 없는 일이잖아. 지금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감독으로서는 고마울 수 밖에 없었지."

 

하지만 최동원도 사람이었다.

 

▲ 최동원이 특유의 커브를 던지고 있다. / 스포츠서울DB

 

5차전 완투와 6차전 5이닝 등 이틀 간 13이닝을 던진 뒤 단 하루 쉬고 선발 등판한 그의 공이 시리즈 초반 같을 수 없었다. 잠실구장 정원을 초과해 입장한 3만5000명의 관중 열기 속에 힘을 내봤지만 실점을 피하지 못했다. 2회말 3실점한 최동원은 1-3으로 뒤지던 6회 오대석에게 좌월 솔로홈런을 내주고 말았다. 펄쩍 펄쩍 뛰며 그라운드를 돌던 오대석을 맞이하러 덕아웃을 박차고 나온 삼성 선수단의 환호. 최동원 시리즈는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 했다.

 

이닝을 마치고 덕아웃으로 들어온 최동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충격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물체처럼 상처를 고스란히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존심과 승부욕으로 똘똘 뭉친 사나이. 우승 문턱에서의 좌절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최동원은 야구만 잘 하던 선수가 아니었다.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에 몰입하지 않고 동료를 먼저 챙겼다. 3년 후배 포수 한문연의 증언.

 

"대석이 형 한테 홈런 맞을 때 사실 내가 고집을 했거든요. 동원이 형은 몸쪽 직구가 싫다고 고개를 저었는데 내가 '여기 들어가면 확실하다'면서 우겼죠. 약간 높게 들어왔는데 (오)대석이 형이 잘 쳤어요. 제가 '형님 죄송합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니까 '야야야 괜찮다. 우리가 여까지 온 것만 해도 어데고, 신경쓰지 마라'고 하더라고요. 또 한번 죄송하다고 하니 '니 때문이 아이다. 내가 던진 공인데 니가 와 죄송하노'라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어요. 그 형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차갑고 냉정해 보일지 몰라도 정말 따뜻한 분이셨어요. 후배를 진심 위해주고, 에러하고 해도 늘 다독거렸어요. 그런 모습 때문에 야수들은 그 형이 마운드에 올라오면 정말 열심히 했지요."

 

한문연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홈런을 허용한 직후 1-4로 뒤진 7회초. 독기를 품은 한문연은 삼성 투수 김일융을 상대로 우월 적시 3루타를 날린 뒤 정영기의 우전 적시타 때 홈을 밟아 3-4 추격을 이끌었다. 롯데 선수들의 한땀 한땀이 모여 만들어진 심상치 않은 분위기. 드라마는 끝이 아니었다. 삼성벤치를 불안하게 만든 묘한 분위기. 극적인 상황이 절정을 향해 끓어오르고 있었다.

 

운명의 8회초. 롯데가 1사후 김용희와 김용철의 연속 중전안타로 1,3루 찬스를 잡았다. 삼성 내야진이 김일융 주위로 모였다. 타석에는 시리즈 내내 극도로 부진했던 유두열. 볼카운트 1B1S에서 불길함을 느낀 김일융이 천천히 1루에 견제구를 뿌렸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힘껏 던진 3구째 몸쪽 낮은 직구. 유두열의 방망이가 전광석화 처럼 돌았다. 높게 비행한 공이 왼쪽 담장 너머 좌석을 가득 메운 관중 사이로 훌쩍 사라졌다. 시리즈 운명을 바꾼 극적인 3점 홈런.

 

유두열의 홈런 직후 최동원의 눈빛은 확 달라졌다. 구위도 달라졌다. 8회 1사 후 함학수에게 우중 3루타를 허용했지만 오대석의 뜬공을 2루수 박영태가 잡아 홈으로 쇄도하는 3루주자를 잡아냈다. 한문연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환호하는 최동원의 명장면을 탄생시켰던 순간. 최동원은 9회 2사 3루에서 장태수를 풀카운트 승부 끝에 라이징패스트볼로 삼진을 잡아냈다. 하프 스윙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펄쩍 펄쩍 뛰면서 달려온 한문연을 얼싸안았다. 한국시리즈 4차례 완투와 4승을 홀로 완성한 그는 그렇게 다시 반복되지 않을 불멸의 역사가 됐다.

 

▲ '불멸의 투수' 최동원이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우승으로 이끈 뒤 환호하는 관중을 향해 손뼉을 치는 장면(사진=롯데) 출처 : 스포츠춘추(http://www.spochoo.com)

 

포수 한문연은 7차전 당시 최동원의 볼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경기 전에 몸을 풀러 나갔는데 캐치볼에 힘이 없더라고요. 스피드도 약하고… 그래도 무조건 자기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으니까 전혀 내색을 안 하더라고요. 팔 푸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아, 더는 안되는구나'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역전 점수를 넣고 난 다음에 볼이 이상하게 갑자기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게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정말 대단한 분이구나'하고 감탄을 했었죠."

 

프로야구 40년 역사상 가장 극적이었던 각본 없는 드라마. 열흘간 펼쳐진 역대 최고의 명승부였다. 그렇게 불멸의 무쇠팔 최동원은 '전설'이 됐다. 오직 최동원이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의 드라마. 최동원은 프로야구 40주년 기념 40인의 레전드에 2위로 이름을 올렸다. 영화까지 만들어진 '영원한 라이벌' 선동열에게 팬 투표에 밀려 1위를 내줬지만 전문가 투표에서는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최동원 vs 선동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벌 해태 선동열과의 멋진 인연. 선동열이 프로에 입문한 두번째 해였던 1986년부터 시작됐다.

 

최동원은 1986년 4월19일 부산 사직에서 선동열과 처음으로 맞붙었다. 두 선수 모두 9이닝 완투로 맞선 경기. 최동원은 3회 송일섭에게 솔로홈런을 내주며 0대1로 패했다. 선동열의 데뷔 첫 완봉승과 함께 최동원의 12연승이 막을 내렸다. "최동원 선배 같은 거대한 목표가 있었기에 나는 더 노력했고 지금 자리에 설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던 선동열 질주의 시작점이었다.

 

그로부터 5개월 후인 8월19일. 최동원은 부산 사직에서 다시 선동열과 맞붙었다. 자존심을 건 두번째 맞대결. 이번에는 최동원이 2대0 승리로 멋지게 설욕했다. 선동열 야구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롯데전 패배로 기록됐던 경기였다.

 

마지막 선발 맞대결은 이듬해인 1987년 5월16일에 부산 사직에서 이뤄졌다. 1승1패로 우열을 가리지 못한 두 선수. 자존심을 건 필사의 15이닝 연장 혈투 대결은 결국 2대2 무승부로 끝났다. '퍼펙트 게임'이란 영화 소재가 됐던 믿기지 않았던 두 슈퍼스타가 펼친 최고 명승부의 하이라이트.

 

▲ 최동원과 선동열, 최고의 라이벌의 당시 모습 / 사진출처=중앙일보

 

이날 최동원은 209구, 선동열은 역대 최다인 232구를 던졌다. 경기 후 최동원은 선동열의 손을 잡으며 "동열아, 우리 끝날 때까지 함 던져볼까?"라고 묻고 선동열이 "형님, 한번 해 볼까요?"라고 답했다는 아름다운 후일담이 남았다.

 

15이닝 완투. '무쇠팔' 최동원에게 후유증이란 없었다. 선동열은 4일 휴식 후 5월 21일에 등판했지만 허리 통증으로 1⅓이닝 만에 자진강판 한 뒤 5월 말까지 개점휴업 했다. 최동원은 달랐다. 사흘씩만 쉬고 잇달아 등판한 이후 3경기에서 완투승→완투승→완봉승을 거뒀다. 믿기 힘든 만화 같은 연투능력이었다. '철인' 최동원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강병철 감독의 증언.

 

"아마추어 대표팀 때부터 연투를 많이 했지. 최동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게 있어.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최동원은 연투가 되는 유일한 피처였다는 사실이지. 선동열 김시진이 최동원의 라이벌이었지만 진정 연투가 되는 피처는 최동원 뿐이었어."

 

▲ 선동렬,최동원,김시진. KBO리그 최고의 투수들이 스포츠서울 1987년 신간호를 위해 함께 모였다. 선동열이 셋 중에 막내다. / 스포츠서울DB

 

최동원의 가공할 연투능력을 1981년 실업 롯데팀 감독 시절 지켜본 박영길 당시 삼성 코치는 1984년 삼성이 한국시리즈 상대로 롯데를 선택하는 것에 반대했지만 삼성 타자가 최동원에 강했다는 내부의견에 따라 관철되지 않았다. 최동원의 저력을 과소평가한, 결과적으로 패착이 됐던 선택이었다.

 

최동원의 프로야구 8년, 그 오르막과 내리막

 

롯데 시절 최동원은 팀당 100~110경기이던 시절에 전성기를 보냈다.

 

그럼에도 입단 첫해인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간 매 시즌 20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페넌트레이스 27승으로 MVP를 거머쥐고, 한국시리즈 4승을 거뒀던 1984년에는 무려 284⅔이닝을 던졌다. 유일한 30승 투수 삼미 재일교포 투수 장명부가 1983년 기록한 비 현실적인 427⅓이닝을 제외한 역대 최다이닝이었다.

 

현존 최고 '이닝이터' 증 하나인 LG트윈스 에이스 케이시 켈리는 "매 시즌 180이닝을 던지면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한다. 최동원의 5년 연속 200이닝 이상 소화가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시즌 동안 매년 200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89승을 거뒀던 최동원.

 

▲ 그 누구보다 강력한 프로야구 8년을 보낸 최동원 / 사진출처=KBO

 

그의 전성기는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부터 꺾인다.

 

최동원은 그해 프로야구 선수협의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현재보다 훨씬 열악했던 2군 선수들의 인권을 위한 희생이었다. 선수들의 노조 설립에 극구 반대했던 구단들과 갈등이 극대화 됐다. 롯데와 최동원 간 갈등도 최고조였다.

 

결국 충격적인 일을 당한다. 그해 11월22일 충격의 트레이드 소식을 접했다. 롯데가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과 삼성 김시진 전용권 오대석 허규옥을 바꾸는 3대4 트레이드를 단행한 것. 영원한 롯데맨인 줄 알았던 그의 충격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다음날 구단을 찾아 이를 확인한 최동원은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 사이 결혼을 하게 된 그는 선배들의 설득 끝에 1989년 후반기 부터 삼성에서 다시 야구를 재개했다. 하지만 반년의 공백기에 이미 야구를 포기한 그의 팔은 더이상 전성기 모습이 아니었다. 구속 120㎞대의 충격적 수치. 결국 최동원은 1990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접었다. 짧고 굵었던 8년 간의 프로 생활이었다.

 

최동원이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

 

최동원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건 야구를 잘했다는 결과 때문만은 아니다. 투철한 노력과 집념으로 밟아온 과정이 그를 빛나는 스타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는 노력파였다. 철저한 프로의식으로 자신에게 끊임 없는 채찍질을 했다. 술과 담배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힘들거나 슬럼프가 오면 더 많은 연습을 했다. 이미 정상에 서 있었지만 최동원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피칭을 마치고 난 뒤 저녁에 부산 사하의 괴정동 집에 있는 연습장에서 엑스트라 피칭을 빼먹지 않았다. 고교 때부터의 루틴. 타깃을 놓고 정확하게 던지는 훈련이었다. "공 1~2개 차로 원하는 곳에 공을 던질 수 있다"던 칼날 제구는 혹독한 반복 훈련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포수 한문연은 "자동차 운전 시 스틱을 쓰면 차의 진동에 팔이 안 좋아질 수 있다며 오토매틱을 사야한다고 말 할 정도로 자기 관리가 투철했던 분"으로 회고한다.

 

▲ 경남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시절의 최동원 / 연합뉴스, 매일경제

 

최동원과 9살 터울 막내동생인 KBO 최수원 심판팀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괴정동 집 연습장에서 스파이크 대신 운동화를 신고 던졌어요. 하체 힘을 키운다고요. 발이 밀리다 보니 운동화가 며칠 만에 구멍이 나곤 했죠. 운동화 투자를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뛰기도 엄청 뛰었어요. 어릴 적부터 아버지(고 최윤식 씨)께서 환경미화원이 새벽에 입는 야광 조끼를 입혀 뛰게 했어요. 왕복 8~10㎞ 씩 뛰었죠. 대학 때 서울 가서도 막내삼촌 집에서 한강공원으로 많이 뛰었어요. '투수한테 하체와 허리는 생명'이라면서 뛰고 또 뛰었죠. 프로에서의 큰 재산이자 무기였던 것 같아요."

 

이러한 노력은 마운드 위에서 자신감으로 승화됐다. "그야말로 야구를 위해 태어난 분이셨죠. 홈런을 맞으면 그 타자한테 그 공을 계속 던집니다. 너한테 계속 맞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서 심리적 우위에 서는거죠. 대단한 승부욕이었어요."(한문연)

 

무모한 승부욕이 아닌 노력으로 똘똘 뭉친 자신감의 발로였다. "형님과 비슷한 연배 야구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모두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고요. 첫째, 두둑한 배포의 강심장, 둘째 직구의 회전과 볼끝, 셋째 던지고 싶은데 던질 수 있는 낙차 큰 커브가 있어 진정한 최고투수였다고요. 형님은 늘 '초구를 허투루 쓰지 말고 유리하게 쓰라'고 하셨어요. 초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유인구 대신 가급적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갔죠."(동생 최수원) 그 만큼 쌓이고 쌓인 연습으로 승화된 자신감이 만들어낸 완성품이었던 셈이다.

 

‘실력과 인격’을 모두 갖춘 레전드

 

‘1m80도 되지 않는 호리호리한 몸매. 무시무시한 강속구와 무쇠팔은 어디서 나온걸까.

 

"형님은 키가 작았지만 가슴이 엄청 넓고 두꺼웠어요.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차려주신 삼시세끼를 맛있게 잘 먹고, 아버지께서 달여주신 인삼 물을 먹던 게 보양식의 전부였어요. 뱀은 근처도 못갔죠. 밤에 일찍 잘 잔 것도 체력유지에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그는 실력과 인격을 갖춘 보기 드문 야구인이었다. 자신에 대해 엄했고, 타인에 관대했다. 그것이 바로 프로야구 최고 스타가 초대 선수협의회 회장이 된 이유였다. 약자였던 2군선수들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느꼈고, 실천에 나섰다. 외로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6년간 룸메이트를 했던 한문연 코치의 증언. "같은 방을 썼어도 한마디도 안했어요. 구단 대표들을 대전에 모이라고 했죠. 구단에서 노조 못 만들게 하려고 난리가 나면서 대의원 5명이 안한다고 하니까, 형님이 고민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렇게 열심히 야구를 하면서도 우리 선수들의 권익 보호를 신경 쓴 생각이 투철한 분이셨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거란 걸 알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의 길을 밝혀주고, 꿈이 돼야 진짜 별"이라는 신념을 온 몸으로 지켰다. 그렇게 그는 자신 만이 아닌 모두의 별이 됐다.

 

▲ 너무나 그리운 그 모습 / 사진출처=KBO

 

마운드 위의 투사였던 최동원. 가정에서 그는 책임감 투철한 과묵한 장남이었다.

 

"형님은 유니폼을 벗으면 말씀이 없는 분이셨어요. 누가 봐도 무뚝뚝하고, 어른들 말씀에 고개를 흔드는 법이 없는 천생 장남이었죠. 저를 포함해 두 동생들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 안했어요. 순둥이였어요. 화내는 모습을 단 한번도 못봤다니까요. 저는 막내다 보니 형님한테 버릇없게 함부로 굴었는데도 싫은 소리 한번 안하고 제 작은 조언이나 이야기도 잘 들어줬어요. 용돈도 '잘 써라'하고 주는게 아니라 책상 위에 슬그머니 놓고 나가는 정 많은 형님이셨죠."(동생 최수원)

 

모든 책임과 짐은 자기가 지는 스타일. 그렇게 받은 스트레스가 암을 키웠다. 연로한 모친을 의식한 그는 끝까지 가까운 주위에도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가족들한테도 처음에는 숨겼어요. 고생하신 어머니께 불효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1차 항암치료 후 5년쯤 돼 거의 나았다고 할 때 뒤늦게 재발했죠. 형수 전화 받고 입원한 병원에서야 그 사실을 알았어요. 항암을 다시 하자고 했는데 극구 거절하시더라고요."(동생 최수원)

 

사직구장에서 열린 2017 KBO리그 롯데와 KIA의 경기에 앞서 故 최동원 6주기 추모행사의 일환으로 롯데 선수단이 최동원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 / 2017. 9. 14. 박진업 기자 upandup@sportsseoul.com

 

별이 지던 날. 불멸의 최동원은 끝까지 야구공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3, 4일 전부터 안 좋아서 준비하라고 하더라고요. 식구들도 사흘 밤을 새웠죠. 새벽 2시쯤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께서 손에 야구공을 쥐어주니까 야구공을 손에서 안 놓더라고요. 마약 성분의 진통제로 정신이 혼미하신 상태였는데 마지막 순간에는 눈을 번쩍 뜨고 가족들 얼굴 찬찬히 보시고 가셨어요."

 

무쇠팔이라 불렸던 불멸의 슈퍼스타. 후배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던 "짧고 굵었던" 야구인 답게 그는 불꽃 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렇게 불멸의 스타는 하늘에서 내려와 야구팬들의 가슴 속 깊은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현석 기자 / 스포츠조선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