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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농구] ㉑ 농구코트 위 엔테베 작전

--유희형 농구

by econo0706 2022. 11. 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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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7. 19.

 

기업팀의 농구단 창단, 스카우트 전쟁 시작


1960-70년대 우리나라 남자 농구팀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기업은행, 전매청, 4개뿐 이었다. 재벌이나 대기업이 없던 시절, 스포츠 육성은 정부 기관과 국영 기업체가 전담했다. 심지어 국세청, 상공부에도 운동부가 있었다. 전매청과 철도청은 6, 7개 종목을 육성했다. 직원 수가 많은 공기업에 정부가 반강제로 운동팀을 운영케 한 것이다.

 

그 후 경제가 나아지고 재벌이 생겨나면서 대기업이 스포츠팀을 창단하기 시작했다. 기업 이미지와 상품 홍보에 효과가 크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1978년 재벌 1, 2위 삼성과 현대가 남자농구를 동시에 창단했다. 이때부터 남자 농구선수들은 살판이 났다. 몸값도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두 재벌 간의 양보 없는 스카우트싸움이 시작되었고, 선수확보를 위한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현대-삼성의 들끓은 경쟁


당시 엔테베 작전을 방불케 하는 스카우트 사건이 있었다. 엔테베 사건은 1976년 프랑스 비행기를 납치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아프리카 우간다 엔테베국제공항에 억류 중인 인질을 이스라엘 특공대가 신출귀몰하게 전원 구출한 사건이다. 그와 비슷한 스카우트 사건이 두 재벌 간에 벌어졌다.

 

당사자는 K대 4학년 A선수로 신장이 불과 174cm, 요즈음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선수다. 그러나 상대 팀에 뺏기는 것이 아까웠는지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몸값이 한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현대가 첫 배팅을 잘해 기선을 잡았다. 라이벌 삼성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 그곳으로 확정되는 듯했다. 삼성 구단은 확보된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멀리 제주도로 피신했다.

 

현대구단은 포기하지 않고 부모에게 접근했다. 금액을 올렸다. 금전 앞에 장사가 없었다. 부모는 마음을 바꿨고, 제주도 호텔에 있는 아들에게 SOS를 쳤다. 오후 7시경, 호텔 근처 음식점으로 이동하던 중, A선수가 사라졌다. 이상한 예감에 감독이 차를 몰아 제주공항에 가서 확인했지만, A선수는 보이지 않았다. 경찰에 실종신고 후 돌아온 대답은 현대가 보유한 경비행기로 이륙했다는 것이다. 삼엄한 감시를 뚫고 줄행랑을 친 A선수는 울산에 가 있었다.

 

한밤중에 도깨비처럼 사라진 선수가 현대팀에 있다는 것을 파악한 삼성 구단 고위층은 노발대발했다. 액수는 고사하고 무조건 잡아 오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구단 프런트는 또다시 선수 부모에게 접근,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자 금전에 이성을 잃은 부모는 아들을 설득했고, 결국 삼성팀에 정착하는 촌극을 벌였다. 스카우트에 휘말렸던 해당 선수는 제대로 현역 생활을 하지 못하고 미국에 이민, 그곳에 살고 있다.

돈앞에 의리는 없다


스포츠계에서 말썽을 일으켰던 선수가 성공하는 것을 보질 못했다. 주변의 질시도 따갑고, 심리적으로 불안하여 운동에 전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K대 졸업 당시 랭킹 1위였던 대어 B선수는 두 구단을 오가며 몸값을 엄청나게 올려놓았지만, 부모의 무리한 욕심에 양 팀이 스카우트를 포기했다. 결국, 한 푼도 받지 못하고 기업은행에 걸어 들어간 일도 있었다. 국가대표 주전급의 실력이었던 B선수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일찍 은퇴했고, 대학 농구코치로 활동하다 농구장을 떠났다.

 

가장 실속을 차린 선수는 C선수다. 농구 명문고를 졸업한 C선수는 대학 4년간 모 팀에 가는 조건으로 아버지 취업, 금전 등의 혜택을 받았다. 당연히 그 팀에 가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그는 최종적으로 다른 팀을 선택했다. 라이벌 구단 총수를 만난 후 곧바로 뒤집었다. 어떤 조건이었는지는 지금까지 비밀이다. 본인만 알고 있다. 모 팀의 4년 공들임은 금전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고, 선후배의 의리도 양심도 소용없었다. 돈이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철학 빈곤의 욕심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스카우트에 얽힌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강자만 살아남는 프로무대


선수들의 몸값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높아지자, 구단들은 해결책으로 프로화를 택했다. 1997년 10개 구단으로 프로농구가 출범했다. 아마추어 규정은 선수에게 금전을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된다고 되어있다. 모두 불법이다. 프로는 선수와 투명한 계약을 한다. 해당 선수의 기량을 분석하여 연봉이 정해진다. 실력 없는 선수는 자연 도태되는 것이다. 

프로와 아마 구분은 간단하다. 아마추어는 현역 은퇴 후 평생직장을 얻어 근무한다. 1971년 당시 축구협회 회장이 재무부 이재국장 장덕진 씨였다. 장 회장이 은행장을 불러 명령했다. 내년(72년)에 무조건 축구팀을 창단하라는 것이다. 한국은행을 제외한 모든 은행이 축구팀을 만들었다. 은행장 임명을 재무부 이재국장이 하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다. 선수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고교, 대학 축구팀에서 주전자만 들었어도 은행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최고의 직장을 얻었다.

 

내가 고교를 졸업할 당시 여러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일찍이 포기했기 때문이다. 금융팀(한국은행, 산업은행, 기업은행)과 전매청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데, 전매청을 택했다. 동료선수 3명을 받아주겠다는 제의가 있었다. 끼워 팔기를 할 때다. 함께 입단한 동료들은 전매청에서 공무원 신분을 얻었지만 나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취업 되었다는 것이다. 프로는 선수 생활을 그만두면 즉시 실업자가 된다. 우수한 선수는 엄청난 연봉을 받지만, 대부분의 선수가 경쟁에서 밀려 조기 은퇴 후 새로운 직업에 도전한다. 

장신센터였던 표필상 선수가 은퇴 후 공개석상에서 발언한 내용이다. “세상에 나와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 농구만 한 것이 후회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 가슴이 아팠다. 실업팀이 있었다면 그러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강자만 살아남는 프로 스포츠의 길이 과연 선수를 위하는 길인가? 생각해 본다.


유희형 / 전 KBL 심판위원장

 

점프볼

 

*사과문*

월간 「점프볼」에 연재되고 있는 유희형의 <나의 삶 나의 농구> 7월호에 게재된 「농구코트 위 엔테베 작전」의 내용 중, 일부가 사실이 아님을 밝히며, 마음의 상처를 입은 당사자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특히 B선수 관련 글, “돈앞에 의리는 없다”의 내용에서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점 마음 깊이 사과합니다. 현재 당사자는 농구계를 떠나지 않았고, 농구발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여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글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농구 후배님께 진심으로 깊은 용서를 구합니다. 추후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재삼 당사자와 부모님께 고개 숙여 송구한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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