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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선수’ 양희종을 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Sports Now

by econo0706 2023. 3. 7.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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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3. 07

 

안양 KGC인삼공사는 46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EASL 챔피언스 위크의 모든 경기를 소화했으니, 이제 8경기만 더 치르면 2022-2023시즌 정규리그도 마무리 된다. 이제 남은 과제는 얼마나 빨리 정규리그 우승을 결정짓는가 뿐이다. 1~2위를 차지할 경우, 4강에 직행하게 된다. 

 

이 말은 곧 ‘농구선수’ 양희종을 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양희종은 지난 2월 22일, 보도자료를 통해 현역 은퇴 소식을 전했다. EASL 대회 참가를 위한 출국 5일 전이었다. 

 

연세대 출신의 양희종은 2007년 프로농구에 데뷔(드래프트 전체 3순위)해 세 차례(2012, 2017, 2021) 우승을 거머쥐고, 국가대표로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거는 등 농구선수로 이룰 수 있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 여기에 5일 열린 EASL 대회에서도 정상에 섰다.

 

이제 마지막 남은 미션은 다시 이뤄질 수 없는 이 조합으로 한 번 더 정상에 서는 것이다. 

 

은퇴를 앞둔 그를 EASL 대회 현장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본 인터뷰는 EASL 풀기자단과 함께 진행했습니다.)

 

Q. 처음부터 이야기해 볼까요?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뭐였나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길거리에서 캐스팅되었어요. 매산초 체육부장님이 "너 몇 살이니", "키 몇이니" 라고 물어보시더니 부모님께 연락하셔서 농구를 제의하셨죠. 원래는 태권도를 하고 있었는데, 관장님이 엄청 아쉬워하셨던 기억이 나요. 가면 안 된다고(웃음). 태권도를 할 때도 또래들보다 키가 커서 한 살 형들과 겨루기도 했거든요.  

 

농구는 3학년 2학기부터 시작했는데 그때는 재밌었어요. 나에게 맞는 걸 찾은 것 같다는 느낌?  공부보다는 운동이 맞는 거 같다고 생각했죠. 공을 던져주면 또래들이랑 가서 공놀이하면서 정신없이 뛰어놀았거든요.

 

4학년이 되면서 본격적인 팀 훈련이 시작되고, 코치 선생님의 엄격한 훈련이 이어졌는데 그때는 '나와 맞지 않는 거 같아'라는 고민을 하게 됐죠. 하하.

 

부모님은 '그래도 시작했으니 더 해봐라'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제가 투정을 부리니 속상해하셨는데, 아버지가 강하게 밀어붙이셨죠. 

 

저도 힘들긴 했어도 훈련을 시작하면 성취욕이 있어서 끝까지 책임감을 갖고 했던 거 같아요.

 

Q. 양희종의 첫 경기가 기억나나요?

 

첫 경기는 기억이 안 나지만 초등학교 5학년 전국체전이 기억나요. 초등학생 때는 1년이 엄청 크잖아요. 5학년 때 키가 크니까 제 학년에서 저 혼자 뛰었어요. 그런데 그게 정말 힘들기도 했어요. 혼나고 버티는 게 너무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죠.

 

Q. 농구로 진로를 정한 건 언제였나요?

 

중학교는 수원이라는 지역 특성상 매산에서 삼일로 자연스럽게 가게 됐죠. 애들이 가니까 저도 따라간 거였죠. 대회 나가면 대회 나가는구나 싶었죠.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 신체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중학교 1학년 당시 제 키가 165~167cm 정도였는데 2학년 때 180cm를 넘겼죠. 2년 사이에 20cm 정도 자라고 힘도 생기고, 탄력도 좋아지다 보니 재미를 갖게 된 것 같아요.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같은 것이 생긴거죠. 원래 골격은 좋았어요. 부모님께 잘 물려받았어요. 부모님이 전문적으로 운동을 하신 건 아니었지만, 아버지께서 180cm가 넘었거든요.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거는 고등학생 때였던 거 같아요. 연습게임을 하면 대학 감독님들이 알아봐 주시고, 칭찬도 해주시니까 '농구를 잘 하면 이런 보너스도 있구나' 싶었죠. 농구를 더 잘 하고 싶어졌죠.

 

Q. 첫 덩크슛은 언제 성공시켰는지요?

 

중학교 3학년이었던 거 같아요. 솔직히 들어간지도 몰랐어요. 들어갔다고 해서 알았죠. 덩크를 하고 나니까 손이 안 아파요. 이 맛이구나, 짜릿하구나라는 느낌도 들었죠.  

 

 Q. 농구인생에 슬럼프는 없었나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부상을 크게 당했어요. 오른발 발날 피로골절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다들 참고 뛰잖아요. 다음 대회까지만 참자라고 생각했죠. 이미 금이 간 상태라 조심하면서 뛰었는데, 제가 점프를 뛸 때 상대가 밟았어요. 그러면서 수술을 받게 됐죠. 

 

다행히 대학이 결정되긴 했지만 수술하고 11개월에서 1년 정도 공을 놓고 살았어요. 정말 힘든 시기였습니다. 각 지역의 잘 하는 선수들이 모두 모이는 학교잖아요. 치열하게 경쟁을 해야 하는데, 몸이 안 따라줬죠. 발날 부상인데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한쪽 다리 전체를 깁스했죠.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건데 그땐 그랬어요. 완벽하게 붙을 때까지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82~83kg였던 몸이 107~108kg까지 쪘어요. 정말 힘들었죠.

 

고교 시절에는 (하)승진이도 같은 팀에 있어서 재밌게 하다가 부상에 가로막히니 당황스러웠어요. 이겨내려고 매일 정말 열심히 운동을 했던 거 같아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재활하고 보강 운동하고, 학교에서도 케어해주셔서 잘 복귀했던 거 같습니다.

 

Q. 프로 초창기는 어땠나요? 그때는 KT&G였죠. 

 

신인 시절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힘들죠. 제가 내향적인 면이 강해요. 어릴 때 MBTI는 '극 I'였죠. 유도훈 감독님이 계실 때였는데 카리스마가 대단하셨어요. 훈련을 많이 할 때였고, 일주일마다 체력 테스트를 했는데 체지방도 기준치를 넘으면 본훈련을 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항상 앞만 보고 뛰었죠.

 

외국선수가 둘이 뛰던 시절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공을 잡는 시간보다 뛰고 허슬 플레이하고, 수비하는 걸 해야만 플레잉 타임을 얻을 수 있었어요.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매치업 상대를 반드시 잡아야겠다는 마인드로 나섰죠. 사실 그렇게 수비를 과하게 하면 숨이 차서 공격할 때 너무 힘들었어요. 심호흡 때문에 밸런스를 못 잡곤 했죠. 

 

패기를 갖고 열심히 하자는 말만 하면서 무식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Q. 안양에서만 뛴 원 클럽 맨입니다. 자유계약선수가 됐을 때 영입 제의도 있지 않았나요?

 

타구단 연락이 있었죠. 제안도 받았고요.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첫 FA가 됐을 때였어요. 그런데 다른 팀에 가서 지금보다 더 나은 플레이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죠.

 

Q. 기억에 남는 순간은?

 

드래프트와 챔피언결정전이 기억에 남습니다. 드래프트 전에 저는 3순위보다는 더 먼저 뽑힐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다 하늘의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챔피언결정전에도 올라 우승을 했잖아요. 젊은 혈기로 덤벼서 우승도 해봤고요. 

 

Q. 늘 수비를 잘 하는 선수로 평가되었습니다.

 

잘한다고 해주시니 더 그렇게 했던 거 같아요. 스스로 잘 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하다 보니 방법도 알게 되고, 길도 보이더라고요. 패스도 종종 이렇게 줄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요. 그런 감각은 남들보다 낫지 않았나 싶습니다. 

 

Q. '양희종'하면 초창기 추승균 전 선수(현 SPOTV 해설위원)를 블록하던 장면이 상징적으로 떠올라요. 

 

사실 블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뜬 게 아니라, 슛이 워낙 좋은 선수니까 불편하게 던지게만 해야겠다고 떴는데 그게 의도치 않게 걸린 거였어요. 그때만 해도 제 몸이 엄청 좋았어요. 주체를 할 수 없을 정도였죠. 뛰는 것도 자신 있었고, 패기도 누구에게 지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Q. 그런 수비에 비해 득점에서의 공헌이 적다는 이유로 '양무록'이란 별명도 따라다녔습니다. 

 

 

별명 참 잘 지으시는 것 같아요. 하하. 그때는 기사에 댓글이 있던 시기잖아요. 처음 별명을 들은 건 지인들에게서 였어요. 술자리에서 이런 별명이 있다고 알려주었죠.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어요. 열받기도 했는데, '재밌네~ '하고 웃어넘기게 됐습니다. 

 

Q. 그렇지만 승부처에서는 늘 빅샷을 담당했습니다.

 

플레이오프, 아시안게임 등 승부처의 중요한 순간이 되면 주위 것들이 희미하게 되면서 림만 보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집중력이 확 올라오죠. 저도 그 원동력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자주 꺼내고 싶은데 경기 내내 쓸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하하.

 

Q. 가장 힘들었던 매치업은?

 

KBL에서는 문태종, 문태영 형제였죠. 두 선수 모두 힘도 좋고, 기술에 슈팅 능력 모두 좋아서 매치업하기 껄끄러웠습니다. 조성민 코치님도 힘들었어요. 전성기 시절 슈팅이 정말 좋았죠. 스피드가 아주 빠르진 않은데 타이밍 뺏는 농구를 잘 했습니다. 그래서 경기를 앞두고 항상 영상 찾아보고 콘디션도 체크했던 기억이 납니다.

 

Q. 문태영 전 선수와는 매치업할 때마다 신경전이 화제였습니다.

 

태영이 형 입장에서는 자기 플레이를 못하게 하니까 짜증났을 거예요. 몸이 계속 닿다보니 서로 한대씩 주고 받고, 그런 신경전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나도 어떻게든 막아야 우리 팀이 이기는 거고, 태영이 형도 골을 넣어야 팀이 이기는 거니까 계속 반복됐죠. 그러다 삼성과의 챔피언결정전 시리즈가 끝난 뒤 서로 고생했다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어요. 태영이 형도 축하한다고 해주었고요. 그 이후로는 서로 감정적으로 부딪치는 일이 없었어요. 그렇게 서로 인정한 느낌이었죠. 

 

Q. 국제대회에서는 누가 있었을까요?

 

레바논의 파디 엘 카티브. 매치업 상대로 정말 까다로웠죠. 2014년 아시안게임에서 상대했던 이란의 니카 바라미도 정말 상대하기 힘든 선수였습니다. 

 

Q. 현시점에서 KBL 최고의 수비수는 누구일까요?

 

문성곤이죠. 농구를 해보니까 공격만으로는 우승할 수 없더라고요. 수비가 기본이 되어야 강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문성곤은 안양의 자존심이에요. 우리가 꼭 잡아야 할 선수이기도 하고요.

 

Q. 여태껏 뛰어오면서 가장 의지했던 사람은? 

 

(오)세근이죠. 소속팀뿐 아니라 대표팀에서도 항상 같이 나갔으니까요. 미운 정 고운 정 다 쌓였어요. 세근이도 다 만족스럽지 않을 텐데, 제가 형이라고 서운한 거 티 안 내고 여태껏 잘 따라와 줬습니다. 든든한 친구예요.

 

Q. 언젠가부터 양희종의 이미지는 '캡틴'이었습니다. 주장 역할을 잘 해왔다고 생각해요.

 

선수들이 잘 할 수 있는 걸 하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해요.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거죠. 그리고 원팀이 되는데 있어 단합된 모습도 필요해요. 다 같이 함께 한다는 느낌을 주는 거죠. 예를 들어 같은 복장이라든가, 같은 컬러의 옷을 입는다는 것 등 말이죠. 또 어느 포인트에서는 누군가 잔소리를 해줘야 해요. 다만 지금 우리 팀은 본인들이 워낙 알아서 다 잘하고 있기 때문에 저만 잘 마무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Q.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마지막 여정에는 '라스트 디펜스'라는 타이틀이 붙었는데요. 

 

과분합니다. 관심과 사랑을 주셔서 정말 영광이고, 농구인으로 살아오며 안 좋은 별명도 생기고 했지만(웃음) 헛되게 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농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행복합니다. KGC인삼공사는 제 농구 인생, 그 자체였으니까요. 

 

Q. 은퇴가 발표되고 주변에서 많이 서운해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주변에서) 그렇게 서운해할지 몰랐어요. 결정을 내린 건 이번 시즌 중반이었어요. 사무국과 '캡틴데이'를 기획하다가 제 생각을 전했죠. 프런트에서도 "네 생각을 존중하고, 코칭스태프와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하셨어요. 한 달 전부터 타이밍을 엿봤어요. 괜히 이야기했다가 연승 중에 분위기를 망칠까 봐 조심했죠. 순위 싸움이 심하잖아요. LG도 턱밑까지 쫓아오고. (오)세근이와 길을 걷다가도 '세근아 실은 말이야'라고 운을 땔까 하다가도 '에이, 하지 말자'하고 관둔 적도 있었죠. 

 

Q. 가족 반대는 없었나요?

 

와이프는 찬성이었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올 시즌이 너무 좋더라고요. 전체적으로 성적이나 분위기가 좋잖아요. 선수들도 워낙 잘 하고 있고요. 제 역할은 코칭스태프가 바뀐 만큼 그 시스템을 양측과 공유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1~2년을 더 뛴다고 한들 저로 인해 앞으로 팀 성적에 큰 변화가 있을까 싶었어요. 저연차 선수들에게는 1~2년이 소중하고 간절한데 그들의 기회를 뺏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3년 계약을 맺을 때 옵션이 코치 연수였어요. 제게 믿음을 주시고 밀어주시니 그런 부분에서 구단과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손대범 / KBS, KBSN 농구해설위원 / SNC스튜디오 제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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