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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축구 (3)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4. 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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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18.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대회보다 심판의 수준은 향상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와 판정 불복은 여전했다. 비록 말썽이 있었다 해도 평양YMCA 주최 대회는 우승 팀을 가려 낸 반면 조선체육회 주최 대회는 그렇지 못해 조선체육회의 체면은 손상을 입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축구의 인기는 요즘이나 90여년 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게 조선체육회는 다음 해인 1922년 2월 11일부터 사흘 동안 경성중학 운동장에서 제 2회 전조선축구대회를 열었다.

 

1922년 2월 11일부터 사흘 동안 경성중학 운동장에서 조선체육회 주최로 열린 제 2회 전조선축구대회대회 중학단에는 휘문고보와 중앙고보, 보성고보, 경신학교, 평양의 광성과 숭실, 대구 계정 등이 참가했다. 청년단에는 반도구락부와 불교청년회, 건강운동부, 평양무오단, 진주청년회, 오성동창회, 숭인체육회, 전주완산구락부, 해주학생회, 주작체육부, 유심학우회 등 11개 팀이 출전했다.

 

서울과 평양, 대구, 진주, 전주, 해주 등 출전 팀들의 지역을 보면 축구가 1920년대 초반에 이미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학단 결승에서는 휘문고보가 중앙고보를 3-0으로 완파하고 우승했다. 청년단 결승에서는 평양무오단이 불교청년회를 3-0으로 누르고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입장료는 일반 40전, 학생 20전으로 그때까지 치른 조선체육회 주최 행사 가운데 가장 비쌌다. 그러나 서울과 평양의 대결이 중학단, 청년단에서 모두 있었기 때문에 첫날부터 많은 관중이 모여들었다. 이때 이미 경성(서울)-평양의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 1924년 평양기독청년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숭실전문 정문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 ⓒ 한국축구 100년사

 

1922년 11월 23일부터 사흘 동안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린 제 3회 전조선축구대회에는 25개 팀이 참가했는데 이 대회부터는 50마일 이상(약 80km) 먼 거리에서 참가하는 팀에게는 50원 이내의 여비를 보조하기로 했다. 또 '심판의 판정은 번복할 수 없다'는 경기 규정을 명문화했다. 이런 규정을 만들 만큼 당시 축구 경기에서는 심판 판정과 관련한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제 4회 전조선축구대회는 11월 21일부터 사흘 동안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소학단이 신설했다. 이 대회를 앞두고 조선체육회는 참가 규정을 고쳤다. '청년단은 3개월 이상 그 단체에 적을 두어야 출전할 수 있고 소학단과 중학단의 경우 그 학교에 1년 이상 재학해야 출전할 수 있다'는 것이 개정 골자였다.

 

이 학교 저 학교를 떠돌아다니며 선수로 뛰는 '떠돌이 선수', '집시 선수'들이 뜻있는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어 이런 제한 규정이 생긴 것이다. 뒷날 유급생 출전 제한과 시도 간 전학 금지 등 여러 규정이 마련된 것과 비교해 보면 90여년 전에도 부정 선수 문제는 골칫거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명철 편집위원 sports@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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