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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축구 (2)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4. 1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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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10.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후원한 매일신보가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도 후원했다. 그러나 대회는 첫날부터 엉망이었다. 공식적인 대회를 치러 본 경험이 없어 심판은 권위가 없고 선수들은 제멋대로 경기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대진표도 미리 짜두지 않고 경기마다 제비를 뽑아 진행했으니 운영 미숙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대회를 앞두고 참가 선수들에게 경기 규칙서를 나눠 줬고 강습회까지 가졌으나 특히 오프사이드 반칙에 대한 말썽이 잦았다.

 

무질서에 시달리면서 대회 첫날을 보낸 조선체육회 임원들은 인천에서 서병희를 불러 대회 2일째 심판을 맡겼다. 서병희는 조선체육회 창립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런던의 킹스칼리지에 다닐 때 축구를 했다. 뒷날 명심판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서병희는 귀국 후 영국 회사인 라이징선 석유회사 서울지점장을 맡고 있었다. 서병희 심판은 위풍당당하고 권위가 있어 선수들이 자연히 복종해 경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그러나 청년단 준결승인 서울 배재구락부와 평양 숭실구락부 경기 후반전에 오프사이드 반칙을 놓고 경기가 중단된 가운데 서울과 평양으로 나뉘어 욕설과 주먹질이 오고가는 난동이 벌어졌다.

 

이 대회에서 나타난 서울과 평양의 대항 의식은 1929년 시작된 서울과 평양의 축구 대항전인 경평전에서 두 도시 시민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뜨거운 경쟁 의식의 시발점이었다.경기를 속행할 수 없게 되자 청년단은 물론 첫날 말썽이 일어난 중학단도 우승팀을 가리지 못했다.

 

제 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중학단도 청년단도 우승팀을 가리지 못하고 끝나자 후원사인 매일신보는 "말썽이 잦자 심판들도 모두 그만두겠다고 해서 인천까지 가서 영국에서 축구 선수로 유명했던 사람을 심판으로 데려왔는데도 그 심판마저 잘못 본다고 하니 사태를 수습할 길이 없다"고 보도했다. 매일신보는 "스포츠에서 지나친 지방 경쟁 의식은 타파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1922년 제 3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한 불교청년회 축구단. 대회 장소는 배재고보 운동장이었다. / ⓒ 한국축구 100년사


제 1회 전조선축구대회는 말썽으로 경기 일정을 마치지 못했으나 이틀 동안 들어온 입장 수입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대회가 중단되면 입장료를 돌려달라는 조직적인 관중들의 요구가 없어 그대로 조선체육회의 수입이 돼 이때부터 조선체육회는 자체 기금을 쌓아 나가게 됐다.같은 해인 1921년 5월 19일부터 이틀 동안 평양YMCA 주최 제 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평양 숭실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회 명칭은 조선체육회와 같았으나 주최자가 다르기 때문에 당시는 어느 단체가 주최하는 대회인가로 구별했다. 평양YMCA 주최 제 1회 전조선축구대회에 배재는 중학단과 청년단 양쪽 모두 불참했다. 석 달 전 서울에서 조선체육회 주최로 열린 제 1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평양 측과 분규를 일으켰던 데 대한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 불참 이유라는 추측이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휘문고보와 불교청년회, 천도교청년회, 서울청년회, 반도구락부 등이 대거 참가했다. 중학단에서는 휘문고보가 우승했다. 청년단에서는 전숭실의 지나치게 거친 플레이 탓에 천도교청년회가 경기를 앞서고 있었으면서도 기권해 버리는 바람에 평양 무오단이 우승했다.조선체육회가 주최한 대회보다 심판의 수준은 향상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와 판정 불복은 여전했다.

 

말썽이 있었다 해도 평양YMCA 주최 대회는 우승 팀을 가려 낸 반면 조선체육회 주최 대회는 그렇지 못해 조선체육회의 체면은 손상을 입었다는 비판을 받았다.축구의 인기는 요즘이나 90여년 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게 조선체육회는 다음 해인 1922년 2월 11일부터 사흘 동안 경성중학 운동장에서 제 2회 전조선축구대회를 열었다.

 

신명철 기자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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