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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축구 (1)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4. 12.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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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1. 04. 

 

이 땅에 언제 근대적 의미의 축구가 들어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한축구협회가 펴낸 '한국 축구 100년사'에 따르면 1882년 6월 제물포항에 입항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의 승무원들이 부두에서 공을 찼다고 한다. 이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관련 내용이다. 이어 7월에는 영국 군함 엥가운드호가 제물포항에 입항했는데 이 배의 선원들은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있던 훈련원에서 축구를 했다고 한다.

 

이후 축구 경기와 관련한 여러 움직임이 있는데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첫 축구 대회는 1921년 2월 11일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개막한 제 1회 전조선축구대회다. 그때도 축구의 인기는 높았다. 이와 관련해서는 그 무렵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1920년 7월 13일 창립한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는 그해 가을 첫 행사로 전조선야구대회를 열었다. 여러 종목 가운데 야구 대회를 가장 먼저 열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체육인들 가운데 조선체육회 창립 주동 인물들이 주로 야구인들이었다. 게다가 1915년 오사카아사히신문 주최 전일본중등학교야구대회에서 사용했던 야구 경기 규칙과 대회 운영 요강 그리고 기록부 등을 갖고 있어서 이 자료들을 참고 삼아 야구 대회를 무난히 치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경기장 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조선체육회 주최 제 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1920년 11월 4일부터 사흘 동안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회 명칭이 전조선야구대회였으나 첫 대회에는 경성(서울) 시내에 있는 팀들만 참가했다.제 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그런대로 성공적으로 치른 조선체육회는 다음 사업으로 축구를 선택했다. 축구는 이미 전국 여러 곳에 학교팀, 사회인팀이 결성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통일된 규칙으로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저런 말썽이 일어나고 있었다.

 

▲ 1909년 서울 삼선평(성북구 삼선동) 경기장에서 황성기독청년회와 대창체육부 선수들이 경기에 앞서 정렬해 있다. ⓒ 한국축구 100년사


조선체육회는 "대회 운영에 대한 준비를 충분히 하고 운영 자금도 마련한 뒤 축구 대회를 열자"고 신중론을 폈다. 그러나 축구 애호가들이 대회 개최를 서둘러 1921년 음력 대보름날(양력 2월 13일)에 맞춰 2월 11일 열자고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그날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제 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막을 올렸다.


제 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전조선(全朝鮮)'을 내걸었어도 휘문고보와 경신학교, 중앙고보, 배재고보, 보성고보 등 중학단 5개팀과 경신구락부와 천도교청년회, 배재구락부, 삼한구락부, 서울YMCA 등 청년단 5개팀 등 경성 시내팀들만 참가했다.
그러나 제 1회 전조선축구대회에는 평양과 정주, 청주, 동래 등 많은 지방 팀들이 출전했다. 중학단에는 오산학교와 보성고보, 배재고보, 경신학교, 휘문고보, 청년학관, 중앙고보 등 7개팀이 참가했다. 청년단에는 숭실구락부와 평양무오단, 전평양축구, 동래구락부, 청주청년회, 천도교청년회, 한성은행, 연희구락부, 배재구락부, 반도구락부, 불교청년회 등 11개팀이나 출전했다.

 

입장료는 야구 대회의 2배인 성인 20전, 어린이 10전이었으나 야구 대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1920년대 단성사와 우미관 등 경성 시내 영화관 입장료가 50전 정도였다고 하고 고급 만년필이 10전인 그때 물가를 고려하면 꽤 비싼 가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성사는 국내 1호 영화관인데 최근 업무용 빌딩으로 바뀌었다. 우미관은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의 본거지로 소개된 곳이다.이 대회에서는 축구 종주국을 자부하는 영국에서 나온 영문 규칙서가 아닌 일본 아사히신문사 발행 운동 연감에 실려 있는 축구 규칙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사용했다. 제 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후원한 매일신보가 제 1회 전조선축구대회도 후원했다.


대회는 첫날부터 엉망이었다. 공식적인 대회를 치러 본 경험이 없어 심판도 권위가 없고 선수들도 제멋대로 경기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려 했기 때문에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대진표도 미리 짜두지 않고 경기마다 제비를 뽑아 진행했으니 운영 미숙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알 만하다. 대회를 앞두고 출전 선수들에게 경기 규칙서를 나눠 줬고 강습회까지 가졌으나 특히 오프사이드 반칙에 대한 말썽이 잦았다. 오프사이드 규칙은 90여년 전에도 축구 경기의 골칫거리였다.

 

신명철 편집위원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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