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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 - 야구 (17)

---[스포츠 種目別 發展史]

by econo0706 2023. 4. 30.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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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06.

 

한국은 파죽의 6연승을 거두며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결승에 올랐으나 상대 조가 아닌 같은 조 2위와 준결승을 치르는 희한한 대회 방식에 따라 아시아 예선을 포함해 일본과 3번째 경기를 치르게 됐고 결국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자랑하는 선수들이 출전한 대회에서 한국은 당당히 4강에 들었다.

 

한국은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올랐지만 이 대회는 프로 선수들이 출전하지 않은 아마추어 선수들의 무대였고 강호 쿠바가 정치적인 이유로 출전하지 않은 가운데 거둔 우승이었다.한국은 올림픽 단체 구기 종목과 인연이 꽤 깊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처음으로 출전한 1948년 제 14회 런던 대회에 축구와 농구가 출전했다. 두 종목의 엔트리는 요즘 기준으로 하면 30명이다. 이 대회에 한국은 축구 16명, 농구 9명이 출전했다. 전체 선수단이 육상과 복싱, 역도, 레슬링, 사이클 등 7개 종목에 67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많은 숫자다. 그때 단체 구기 종목에 출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알 수 있다.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9전승 금메달에 성공한 한국 대표팀 / ⓒ Gettyimage.

 

선수단을 구성하기까지 각 경기 단체는 자기네 종목에서 한 명이라도 더 보내려고 다른 종목을 헐뜯고 같은 종목 안에서도 서로 비방하는 등 잡음이 많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올림픽 선수단을 런던으로 보내야 하는데 8월 15일까지 통치권을 가진 미군정청이 비용을 마련해 줘야 참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미군정청은 선수단 인원이 많으니 10명을 줄이라고 대한체육회에 통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렵사리 선수단을 구성한 대한체육회가 10명을 줄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때 일부 체육인들로부터 친일파로 배척 받아 체육계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던 이상백이 “모두 다 보낼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한체육회 간부들이 그를 찾아가 협조를 부탁했다. 이상백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를 지내고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선수단 임원,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 선수단 총무를 맡았기 때문에 일부 체육인은 그를 친일파라고 몰아세워 올림픽 선수단 구성에 참여하지 못하게 견제했다. 그러나 다급해진 대한체육회로서는 이상백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미군정청은 올림픽 출전 한국 선수단에 관한 결정을 발표한다고 대한체육회에 통보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이상백이 나타나지 않자 미군정청 관계자는 “이상백 씨는 왜 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으면서 발표를 보류했다. 대한체육회 간부들은 이상백이 있는 동방문화연구소로 사람을 급히 보내 이상백을 발표 장소로 불렀고 이상백이 참석하자 미군정청은 “주한미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의 지시로 한국의 올림픽 선수단을 모두 보내기로 했습니다”라며 올림픽 선수단 파견에 따른 결정을 발표했다. 미군정청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리자 이상백을 배척했던 사람들도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지 중장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움직였다. 하지 중장에게 명령할 수 있는 윗사람이 태평양 주둔 연합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었다. 맥아더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했고 1928년부터 2년 동안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체육인이다. 그때 미국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이상백과 친한, 아마추어리즘의 신봉자 에이버리 브런디지였다.이상백은 미국에 있는 브런디지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브런디지는 맥아더 원수에게 연락해 하지 중장으로 하여금 한국 올림픽 선수단을 모두 보내도록 만든 것이다.어렵사리 런던에 간 축구는 1회전에서 골 공방전 끝에 멕시코에 5-3으로 이겨 8강에 올랐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한 김용식은 12년 뒤 열린 이 대회에 참가했다. 남자 농구의 장이진과 함께 두 나라 국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한 주인공이 됐다. 한국은 이 대회 우승국 스웨덴과 치른 8강전에서 0-12로 크게 져 탈락했다.농구는 조별 리그 B조에서 칠레와 벨기에, 중화민국(대만), 필리핀과 물고 물리는 접전을 펼친 끝에 골득실차에 힘입어 8강에 올랐다.

 

그러나 8강전에서 멕시코에 32-43으로 져 순위 결정전으로 밀려 난 뒤 내리 져 23개 나라 가운데 8위를 했다. 한국은 대회에 출전한 아시아 5개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8강에 올랐다.이렇게 올림픽과 인연을 맺은 단체 구기 종목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여자 배구가 동메달을 딴 데 이어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서 여자 농구와 여자 핸드볼이 나란히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때 이후 단체 구기 종목에서는 여자 선수들의 분전이 눈부셨다. 여자 핸드볼이 금메달 2개와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차지했고 여자 하키는 은메달 2개를 기록했다.

 

남자는 핸드볼이 1988년 서울 대회, 필드하키가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각각 은메달을 땄다. 그리고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정식 종목이 된 야구가 단체 구기 종목의 메달 레이스에 힘을 보탰다.야구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1912년 스톡홀름, 1936년 베를린, 1952년 헬싱키, 1956년 멜버른, 1964년 도쿄, 1984년 로스앤젤레스, 1988년 서울 대회에서 맛보기 경기를 펼치며 올림픽에 나서기 위한 장기간의 정지 작업을 벌인 끝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고 한국은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 9전 전승 금메달의 신화를 쓰게 된다.

 

신명철 편집위원 smc@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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